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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hab Story · 2,500 Years of Movement

움직임은
가장 오래된 약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체육관에서 전쟁터의 병원으로, 포로수용소에서 카리브해의 오두막으로. 사람들은 다치고 아플 때마다 다시 움직이는 법을 찾아냈습니다. 재활이 걸어온 2,500년의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CHAPTER 1

고대의 운동 처방전

"약 대신 운동"은 요즘 말이 아닙니다. 2,500년 전에도 의사들은 처방전에 '걷기'를 적었습니다.

너무 열심이었던 의사, 헤로디코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헤로디코스는 체육 교사이자 의사였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를 "체육을 처음으로 치료에 쓴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처방은 꽤 혹독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는 그가 환자들에게 아테네에서 메가라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라고 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편도만 수십 킬로미터입니다.

그래서 평판도 엇갈렸습니다. 플라톤은 "병약한 사람의 삶을 질질 끌게 만든다"고 비꼬았고,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기록에는 "열이 나는 환자를 지나친 운동으로 죽게 했다"는 비판까지 남아 있습니다. 운동은 약이지만 용량이 중요하다는 교훈은 이때부터 있었던 셈입니다.

히포크라테스와 '걷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글 『섭생에 관하여』에는 음식과 함께 운동과 산책을 조절해 건강을 지키라는 내용이 자세히 나옵니다. 운동을 체질과 계절에 맞춰 '처방'한 것입니다.

"걷기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약이다."— 히포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전해지지만, 실제 원전은 확인되지 않은 문장입니다.

검투사의 주치의, 갈레노스

2세기 중반, 로마 시대 최고의 의사 갈레노스는 고향 페르가몬에서 검투사들의 주치의로 일했습니다. 칼에 베이고 뼈가 부러진 몸을 매일 돌보며 그는 몸의 구조와 회복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훗날 그는 『작은 공으로 하는 운동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서, 여럿이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몸 전체를 고르게 쓰고 마음까지 즐겁게 하는 최고의 운동"으로 꼽았습니다. 재미있어야 오래 한다는 것, 2세기의 의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1973년 중국 후난성 창사의 마왕퇴 3호 무덤(기원전 168년)에서 비단 한 폭이 나왔습니다. 「도인도(導引圖)」라 불리는 이 그림에는 남녀노소 44명이 11명씩 4줄로 서서 팔을 뻗고, 몸을 비틀고, 숨을 고르는 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운동 동작표'로 꼽힙니다. 2,000년도 더 전에 이미 '그림으로 보는 홈트'가 있었던 셈입니다.

CHAPTER 2

체조가 치료가 되고,
기계가 등장하다

스웨덴 체조의 아버지, 페르 헨리크 링

1813년, 스웨덴의 페르 헨리크 링은 스톡홀름에 왕립 중앙체조연구소를 세웠습니다. 그는 체조를 교육·군사·의료·미용의 네 갈래로 나눴는데, 그중 '의료 체조'가 오늘날 물리치료의 뿌리가 됩니다. 이 학교는 지금도 스웨덴 체육·스포츠 대학(GIH)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링을 '스웨디시 마사지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는 글이 많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링의 체계에는 마사지가 없었고, 지금의 마사지 기법은 네덜란드 의사 요한 메츠거가 정리한 것에 가깝습니다.

세계 최초의 헬스장, 잔데르 연구소

1865년, 스웨덴 의사 구스타프 잔데르는 스톡홀름에 기계 27대를 갖춘 '의료기계 체조 연구소'를 열었습니다. 지렛대·추·스프링으로 저항을 조절하는 기계들이었는데, 약한 환자도 정확한 강도로 운동하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증기와 전기 모터로 움직이는 기계까지 나왔습니다.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서 상을 받은 뒤 잔데르식 연구소는 전 세계로 퍼졌고, 오늘날 헬스장 운동기구의 조상으로 불립니다.

무거운 쇳덩이를 드는 지금의 헬스장과 달리, 출발점은 재활이었습니다. 스프링으로 저항을 조절하는 필라테스 기구, 도르래와 추를 쓰는 자이로토닉 기구는 모두 이 계보 위에 있습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에도 체육관이 있었습니다. 보트 데크의 체육관에는 전기로 움직이는 '낙타'와 '말', 노 젓기 기계, 자전거가 있었고 강사 토머스 매콜리가 승객을 지도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치료 체조 기계와 같은 계열이었습니다.

CHAPTER 3

전쟁과 전염병이
재활을 키웠다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과 소아마비 유행은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재활이 하나의 직업과 학문이 됩니다.

재건 보조원과 물리치료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은 부상병을 돌볼 여성들을 모집해 '재건 보조원(Reconstruction Aides)'이라 불렀습니다. 마사지와 운동으로 병사들을 다시 걷게 한 이들이 오늘날 물리치료사의 직접적인 선배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프로그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메리 맥밀런과 동료들은 뉴욕의 한 식당에 모여 회비 2달러짜리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1921년 3월 맥밀런이 초대 회장으로 뽑혔고, 이 모임은 훗날 미국물리치료사협회(APTA)가 됩니다.

의사들이 무시한 간호사, 엘리자베스 케니

엘리자베스 케니 (1880–1952)호주의 오지 간호사 · 소아마비 재활의 개척자

20세기 초 소아마비 환자는 굳은 팔다리를 부목과 깁스로 고정하는 것이 표준 치료였습니다. 호주 시골에서 일하던 간호사 엘리자베스 케니는 반대로 했습니다. 뜨거운 찜질로 경련을 풀고, 근육을 다시 움직이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의사들은 '시골 간호사'의 방법을 믿지 않았습니다. 1940년 미국에 건너가서도 뉴욕과 시카고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미니애폴리스와 메이오 클리닉의 의사들이 그 효과를 알아봤습니다. 1942년 미니애폴리스에 케니 연구소가 세워졌고, 1950년대 초 갤럽 조사에서는 엘리너 루스벨트를 제치고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1위에 올랐습니다. 미국 의회는 그녀가 비자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특권까지 줬습니다.

병상 곁을 지키는 간호사의 눈이 의학의 상식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개비스튜디오 원장도 외과 수술실 간호사 출신입니다. 수술대 위의 몸과 회복실의 몸을 모두 본 경험은 재활을 설계할 때 큰 힘이 됩니다.

재활의학의 아버지, 하워드 러스크

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 항공대 군의관이던 하워드 러스크는 병원 침대에 누워 시간만 보내는 회복기 병사들을 보고 1942년 미주리주에서 운동과 직업 훈련을 결합한 회복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항공대 회복센터 12곳으로 커졌고, 전쟁 뒤 그는 뉴욕대에 재활의학 연구소(지금의 러스크 연구소)를 세웠습니다. '재활의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러스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그 이야기는 7장에서 이어집니다.

패럴림픽의 시작, 루트비히 구트만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건너간 유대인 신경외과 의사 루트비히 구트만은 1944년 스토크맨더빌 병원에 척수손상 병동을 열었습니다. 당시 척수손상 환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여겨졌지만, 그는 환자들을 침대에서 일으켜 스포츠를 치료로 썼습니다.

1948년 7월 29일, 런던 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바로 그날, 병원 잔디밭에서는 휠체어 선수 16명이 참가한 양궁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스토크맨더빌 대회'가 1960년 로마에서 처음 국제 대회로 열렸고, 이 대회가 지금은 제1회 패럴림픽으로 인정받습니다.

  1. 1917–1918미 육군 재건 보조원

    물리치료사라는 직업의 출발점

  2. 1921미국 여성 물리치료 협회 창립

    메리 맥밀런 초대 회장, 훗날 APTA

  3. 1942케니 연구소 · 러스크 회복 프로그램

    "눕혀 두지 말고 움직이게 하라"

  4. 1948스토크맨더빌 대회

    런던 올림픽 개막일에 열린 휠체어 양궁

  5. 1960로마 대회

    지금은 제1회 패럴림픽으로 인정

CHAPTER 4

침대의 배신

아프면 푹 쉬어야 한다? 20세기 중반까지 의학의 상식이었던 '절대 안정'은 생각보다 위험했습니다.

"침대에 눕는 것의 위험"

1947년 영국 의사 리처드 애셔는 영국의학저널(BMJ)에 「침대에 눕는 것의 위험」이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오래 누워 있으면 혈전, 욕창, 폐렴, 근육 소실, 신장 결석이 생긴다는 것을 조목조목 짚은 이 글은 지금도 의대에서 읽히는 명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수술 뒤 일찍 걷게 하는 '조기 보행'이 퍼지면서, 2차 대전 이후 많은 병에서 오랜 침상 안정이 사라졌습니다.

3주 누워 있기 vs 30년 나이 먹기

1966년 미국 댈러스에서 건강한 20세 남성 5명이 실험에 참여했습니다. 3주 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심폐 체력이 크게 떨어졌고, 이후 8주 동안 훈련해 다시 회복했습니다.

30년 뒤 연구진이 같은 사람들을 다시 불렀습니다. 50대가 된 그들의 체력을 재 보니, 놀랍게도 20살 때 3주 동안 누워 있었던 것이 30년 동안 나이를 먹은 것보다 체력을 더 많이 떨어뜨렸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요즘 재활의 원칙은 "통증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능한 한 빨리, 안전하게 움직이기"입니다. 관절에 부담을 주지 않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필라테스와 자이로토닉이 재활에 쓰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CHAPTER 5

병약한 소년, 조셉 필라테스

조셉 필라테스 (1883–1967)독일 묀헨글라트바흐 출생 · '컨트롤로지' 창시자

1883년 독일에서 태어난 조셉 필라테스는 천식과 구루병 등을 앓던 병약한 아이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체조를 비롯한 여러 운동을 연구하며 약한 몸을 스스로 단련해 나갔습니다.

포로수용소의 운동 교관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그는 영국에 있었습니다.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랭커스터에 억류됐다가 영국령 맨섬의 노칼로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매트 운동을 가르쳤습니다.

"수용소 병원 침대에 스프링을 달아 환자를 운동시켰고, 그것이 캐딜락 기구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기록으로 확인된 적은 없는 전설입니다. 맨섬의 수용소 연구자들은 "그럴 법하지만 증거는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수용소 병원에 스프링 침대가 있었고 그가 병원 일을 도왔을 가능성은 있다고 합니다.

뉴욕 8번가 939번지

1926년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는 배에서 그는 훗날 아내가 되는 클라라를 만났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뉴욕 8번가 939번지에 스튜디오를 열었는데, 마침 같은 건물에 무용 스튜디오들이 있었습니다. 부상당한 무용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안무가 조지 발란신과 제롬 로빈스, 현대무용의 어머니 마사 그레이엄도 그의 고객이 됐습니다.

그는 자기 운동법을 '필라테스'가 아니라 '컨트롤로지(Contrology)', 즉 마음으로 근육을 조절하는 학문이라고 불렀습니다. 1934년 『당신의 건강』, 1945년 『컨트롤로지를 통한 삶으로의 귀환』을 펴냈습니다. 약 40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1967년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 클라라와 제자들이 스튜디오를 이어갔습니다.

스프링으로 저항을 조절해, 약한 몸도 정확하게 움직이게 한다.— 리포머 · 캐딜락 · 체어 · 바렐, 개비스튜디오의 필라테스 대기구가 모두 이 원리에서 나왔습니다.

CHAPTER 6

무대에서 쓰러진 무용수,
줄리우 호바스

줄리우 호바스 (1942–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출생 · GYROTONIC® · GYROKINESIS® 창시자

자이로토닉의 이야기는 한 무용수의 부상에서 시작합니다. 1942년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헝가리계로 태어난 줄리우 호바스는 체조와 수영 선수였습니다. 19살에 춤을 시작해 21살에 루마니아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됐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망명, 그리고 뉴욕

1970년 이탈리아 순회공연 중 그는 공산 정권의 루마니아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탈리아 난민 캠프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미국 망명을 허락받아 뉴욕에 정착했습니다. 뉴욕시티 오페라에서 춤추고, 라디오시티 뮤직홀의 객원 무용수로 서고, 전설적인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과 함께 순회공연도 했습니다.

끊어진 아킬레스건

휴스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활동하던 중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면서 그의 무용 인생은 끝났습니다. 무대에서 쓰러진 무용수는 1977년 카리브해의 세인트토머스섬으로 떠났습니다. 방 한 칸짜리 오두막을 직접 짓고 6년 동안 요가와 명상에 몰두하며, 자기 몸을 되살릴 움직임을 처음부터 다시 찾았습니다.

'무용수를 위한 요가'에서 자이로토닉으로

1980년대 초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브로드웨이의 무용 스튜디오 '스텝스 온 브로드웨이'와 센트럴파크, 자신의 화이트 클라우드 스튜디오에서 '무용수를 위한 요가'를 가르쳤습니다. 의자와 매트 위에서 척추를 물결처럼 움직이는 이 수업이 지금의 자이로키네시스®입니다.

그는 이 움직임을 더 깊이 할 수 있도록 나무로 직접 기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도르래와 추, 돌아가는 휠로 몸이 원과 나선을 그리게 하는 기구, 바로 자이로토닉®입니다. 이름은 그리스어로 '돌다'라는 뜻의 'gyro'와 '늘이다·긴장'을 뜻하는 'tonic'을 합친 것입니다. 1990년대 후반 제조 파트너를 찾기 전까지 그가 손으로 만든 기구가 400대가 넘었다고 합니다.

필라테스와 자이로토닉의 창시자는 묘하게 닮았습니다. 둘 다 유럽에서 태어나 뉴욕에 정착했고, 둘 다 자기 몸의 약함과 부상을 이겨내려다 운동법을 만들었으며, 둘 다 무용수들의 사랑을 받으며 퍼졌습니다.

현재 자이로토닉 본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고,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1만 3천 명이 넘는 공인 트레이너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이로토닉 기구는 본사 인증 교육을 마친 강사만 구입하고 지도할 수 있습니다.

필라테스가 '정렬과 안정'을 가르친다면,
자이로토닉은 '원과 나선의 흐름'을 가르칩니다.— 개비스튜디오는 두 방법을 몸 상태에 맞게 함께 씁니다.

CHAPTER 7

한국의 재활,
전쟁의 폐허에서

한국 재활의 역사는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1949년, 세브란스의 첫 물리치료

1949년 2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텔마 모(Thelma B. Maw)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일반 환자를 대상으로 물리치료를 시작했습니다. 한국 물리치료의 출발점으로 기록되는 순간입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러스크, 한국에 오다

전쟁은 수많은 절단 장애인을 남겼습니다. 1959년 추산으로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만 2만 명이 넘었고, 민간인을 합치면 5만 명이 넘었습니다. 1953년 초, 3장에 나온 하워드 러스크가 한미재단 조사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습니다. 이후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으로 부산 동래에 재활센터가 세워져 의수·의족을 만들고 직업 훈련을 했습니다.

같은 무렵 오정희 교수는 국립 재활기관에서 의무 책임을 맡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활의학'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 1949세브란스병원 물리치료 시작

    선교사 텔마 모

  2. 1953러스크와 한미재단 조사단 방한

    부산 동래 재활센터 설립으로 이어짐

  3. 1959 · 1963연세대 소아재활센터 · 절단자 재활센터

    병원 중심 재활의 시작

  4. 1960년대 중반물리치료사 면허 제도 도입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다

  5. 1972대한재활의학회 창립

    회원 약 50명으로 출발

  6. 1986국립재활원 개원

    국가 재활 의료의 중심

  7. 2000년대필라테스 · 자이로토닉 국내 보급

    재활 운동이 병원 밖 일상으로

EPILOGUE

그리고 다시,
움직임

2,500년 전 헤로디코스는 환자를 걷게 했고, 엘리자베스 케니는 굳은 근육을 다시 움직이게 했고, 조셉 필라테스는 스프링으로, 줄리우 호바스는 나선으로 몸을 되살렸습니다. 방법은 달라도 답은 하나였습니다. 몸은 움직일 때 회복합니다.

개비스튜디오는 그 오래된 지혜를 오늘의 당신 몸에 맞게 설계합니다. 수술실 간호사로서 쌓은 인체에 대한 이해, 필라테스와 자이로토닉 기구, 그리고 1:1의 세심함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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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참고 자료

이 글은 일반적인 역사 정보이며 의학적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몸 상태에 맞는 운동은 상담 후 안내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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